2013년 6월 26일 수요일

정덕영의 시편묵상 (69:1-3)

이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새들의 지저김이 늘 그러하듯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새 힘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함께 메일로 나눌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1-3)

  시인은 자신의 영혼 안으로 깊이 흘러 들어온 물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목도하며, 하나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위급함을 당할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구원을 부르짖게 됩니다. 이는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분임을 우리 영혼이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귀한 신앙체험을 지나온 시기에 많이 가지고 있음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까지 흘러 들어온 '물들' 혹은 '깊은 수렁' 또 다른 '큰 물'을 목도하며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시인은 4절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수많은 원수들의 무리에게서 시인이 당했던 핍박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이는 시인에게 죽음의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음도 알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당한 시인은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피곤했고' '목이말랐고' 또 '눈이 쇠하여졌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시인의 영혼은 다른 시편에서 다음과 같은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오늘 이 시인의 노래가 역경 중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의 찬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존 칼빈 주석/시69:3) 가장 극심한 깊은 역경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그 외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도록 하겠는가? 바울이 증거한 대로(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지옥까지라도 모든 깊음을 말끔히 없애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함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안하세요
peace be with you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정덕영의 시편묵상 66:8-9


  이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그리고 새들의 지저김이 늘 그러하듯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새 힘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함께 메일로 나눌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8-9) 

  시인은 어떤 특별한 감동을 통해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체험해 왔던 주님의 은혜를 잠잠히 자신의 안에 담아 두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내어 들려지게 하도록 해야 하는 마음의 감동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이미 주님께서 택함받은 성도들에게 이루신 구원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님께서 이루어 가실 주님의 교회들에 대한 구원과 그 구원의 지속에 대한 소망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우리 영혼이 살아 있게 되는 이유'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시인은 주님께서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고 우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늘 살아 있도록 놓여 지게 되는 근본 이유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체험을 되돌아 볼때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과연 우리에게 실족했던 경험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 보입니다. 때로는 그 실족함이 너무도 심해서 회생될 소망을 전부 상실했다고 스스로 느낄때도 있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나 그런 실족함을 만날때 마다 다시 소생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늘 체험해 왔고, 우리를 끝까지 구원으로 붙들고 계신 말씀의 능력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음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는 이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뜻임을 알게 될때 우리의 영혼은 오늘도 주님의 그 사랑안에서 평안함을 느낄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존칼빈주석/시66:8-9)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의 말을 한다. 이는 곧 그들이 늘 받았던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의 도우심을 통해 실족한 일이 없이 오히려 굳건히 서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시편 기자가 생각할 수 있고, 또 전도될 수 있는 악을 그 실제 이하로 줄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선의 개입으로 안전하게 보전되었으므로 기자는 이것을 ‘생명으로 건져졌음’ 또는 ‘소생함을 받은 것’과 동등한 것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평안하세요
peace be with you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Joseph Dukyoung Chung (올림)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정덕영의 시편묵상

  이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새들의 지저귐이 늘 그러하듯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새 힘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함께 메일로 나눌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이 구절에서 특히 저의 마음을 붙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근심하는'과 '두려움에서'입니다. 여기에서 근심은 염려나 고민이라고 말할수도 있으며, 시인은 현재 어떤 염려안에서 하나님에게 소리를 발하며 자신의 그 고민에 찬 음성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근심의 상태가 너무 깊어서 시인의 소리가 외부로 발설되지 못하고 시인의 마음 속으로만 울려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시인과 같은 경험을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가끔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이 구절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그 근심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인의 생명을 보존할수 없을 것 같은 심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시킬 가능성이 없음에 대한 공포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갈망하고 있는 '생명의 보존'은 육신의 생명을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우리 신자들이 생명을 잃는 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인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되었을 때 시인은 그 두려움으로 근심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흔히 '원수의 두려움'은 신자들의 육신에 대한 파멸을 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 궁국적인 목적은 우리 영혼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우리의 입은 그 두려움에 눌려서 '무섭습니다'라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고백하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절박한 자신의 호소가 하나님에게 들려졌음을 확신하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이루어진 모든 신앙적 체험들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호소에 대해 주님이 주시는 응답을 점차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존 칼빈/ 시 64:1) 내가 덧붙일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의 악의와 사악성에 대하여 말함으로 기도가운데서 자기 주장에 힘을 더하는 하나의 탄원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원수들의 행위가 더 잔인하고 불의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비례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섭하시리라는 것을 믿을 만한 더욱 유리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평안하세요
peace be with you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Joseph Dukyoung Chung (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