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3편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으신지요?
“참 세상은 불공평하다!”
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렇게 잘 살 수 있을까?”
더나가서는 한국 사람이 잘 사용하는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소치 올림픽 500m에서 금메달을 딴 이상화는 인텨뷰에서 “이깟 올림픽이 무엇인데 날 이렇게 괴롭게하나?” 생각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 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잘사는 사람들의 가정배경과 과정 그리고 앞으로 될 일들을 모르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살면서 보는 것으로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오늘 시편 73편에 시편기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말씀은 표준새번역으로 봉독하겠습니다.
시편 73편 1-3 함께 읽겠습니다.
이 시편 기자만이 아니라 호세아 선지자와 에례미아 선지자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것을 봅니다.
호세아선지자는 왜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십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예례미아선지자는 이악한 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나에게 이렇게 못살게 굴고 또 나를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고생을 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며 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예레미아 선지자는 20장 9절에 :“에이 하나님의 종노릇 못해먹겠다 집어치우자!” 란
생각을 하고 또 그는 그대로 실행에 옴겼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요사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담임목사님은 제외하고요!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말썽을 부려 학교에 전화가 오면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정말 못먹겠다. 란 생각을 하고
또는 가계의 직원들이 말썽을 부리거나 사업상 문제가 발생하면 자연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미끄러질 뻔하였도다“(시73:3)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살아가면서 악인들이 잘되는 것에 대한 의분이 많은 듯합니다.
무엇이 이 시편기자의 마음과 삶을 이렇게 힘들게 한 것일까요?
성경을 통해 우리도 위로 받고 또 우리의 삶에 대한 질문이 해결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인은 거만한 자를 시샘하였다고 합니다
시샘은 사람이면 자연적인 것입니다.
특별이 여자분들은 나보다 예뿐 여자들을 시샘하고 입을 삐쯧이는 것을 봅니다.
저의 아내도 그런 것을 볼 때면 아! 여자들은 다 그런 마음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여자를 여자인 자신이 시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여자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남자들도 자신보다 더 건장하고 또 키가 나보다 큰데 머리칼은 그대로 있고 거기다 돈까지 잘 벌어 오고 또 옆에는 미녀가 서있으면 은근히 속에서 부화가 남니다.
왜 난이래!
나도 역기나 좀들어야 겠군.........이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거만한 사람을 시샘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기자는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한 삶을 보고 시샘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거만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며 별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배가 아푼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길 난 언제 저렇게 한번 살아보지!
그렇게 말하면 옆에서 듣던 우리의 아내들의 대답은 어떤지 잘 아십니다.
당신이...............
네 그만하겠습니다.
시인은 거만한자가 평안이 잘먹고 잘사는 것에 대하여 배가 아푼 것 만이 아님니다.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거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4-8)함께 읽겠습니다
(시73: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5절에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시73:6)그들에게는 오만이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시73:7)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으며, (시73:8)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람을 만나보셨나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은근이 부화가 치밀어 오르고 한편으로는 난 언제 저렇게 될수있을까?
그런 생각해보지 아니하였나요?
그 뿐만이 입니까?
시인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9-12)함께 읽겠습니다
(시73:9)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시73:10)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시73:11)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하고 말한다. (시73:12)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어떻습니까?
이 시를 쓴 시인이 우리의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지 아니하십니까?
한국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담의 뒷이야기는 좀 다름니다.
옛날에 땅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런데 사촌이 땅을 샀는데 자신은 어려워서 도와 줄 것은 없고 배라도 아파서 그땅에 거름이라도 주어야 하겠는데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쩠거나 지금은 남 아니 나의 피붓이 까지도 나보다 잘살면 배가 아푼 것은
현세대에 사는 우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거만하고 거들먹 되는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지 아니한 것은 오히려 정신이상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13-14)
이제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낌니다.
13-14절을 보시겠습니까?
(시73:13)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시73:14)하나님, 주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혹시 나 자신은 이렇게 하나님께 나의 고난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는 아니하였나요?
아니면 이렇게 된 것이 내 친척이나 가족들 때문에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 대한 원망과 분한 마음은 없으신가요?
시인은 13절에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한 사람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 제일 앞부분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습니까?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을 것입니다.
아삽은 누구입니까?
아삽은 다윗왕이 재임하던 시절부터 궁중에서와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옴겨 올 때도 그 앞에서 악기와 찬양으로 인도하던 지휘자이며 그 직책은 그의 아들들이 세습되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데 매우 귀하게 쓰임을 받던 인물인 것입니다.
그가 쓴 시 곧 그의 찬송가의 가사의 내용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는 13절 말씀과 같이 고민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는 어려운 가운데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이 우리 담임목사님가정이 어려움을 감당하시는 것을 볼 때 안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꼭 이렇게 사업을 운영해야 하나?
란 생각을 하곤합니다.
저의 아내도 가끔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많이 주시실 않으실까?
우리는 돈이 많으면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 잘아 실터인데 왜 그래?
그러면 저는 거룩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몰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근방 부자가 되게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손님들로 하여금 고려제과가 생각나게 하시고 또 빵 맛이 생각나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가운데서라도 순종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시편 기자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에 배가 아프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아니하는데 어려움도 없고 또 그들은 아프지도 아니하고 거만하게 사는 것이 한 마디로 눈골 사납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인으로 이 자리에 머므르면 우리는 사단과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쉽게 성공하라고 속삭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왜 그렇게 유별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냐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꿈으로 또는 TV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면 모든 것을 줄게..... 눈 꼭 감고 한번이면....
이것이 하와에게 사단이 속삭인 속임수이고 또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을 시험하던 내용입니다.
사단은 우리도 그렇게 시험하면 쉽게 넘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15절에서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서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한분 그리고 하나님만으로 우리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닭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며 전심으로 경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볼 때 잠시 힘든시간을 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신앙을 붙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73:16)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한세상을 살아 갑니다
지난 달 25일 에 저는 삶의 한 단계 올라섰습니다.
내가 원하던 아니 원하던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으니 저는 졸지에 “할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인생의 삶의 문제는 우리가 잘 모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 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답을 하나님 안에서 찿았다는 것에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의 삶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내세에 대한 것을 모릅니다.
모든 인생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설수밖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아내나 아들이 대신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 신앙은 내가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넘어질 때 일으켜 주고 믿음이 약해질 때 서로 붙들어 줌으로 함께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사랑으로 지켜주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삶의 고민이 답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야 알았다고 합니다.
시편 73편 17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시73:17)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악한 일을 저지르고 버젓이 잘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성도여러분 히브리서 12장 5-9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8절을 주의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아들과 옆집아이들이 놀다 우리집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때 나는 누구를 책벌을 하는가요?
내 아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내 아들을 빼놓고 옆집아이들을 책벌하는가요.
아니죠! 그들은 그들의 부모가 책벌을 하게 놔두고 내 아들이 잘못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책벌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바른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 기위해서 성도들을 징계하신 다는 것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사생아” 즉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면 그는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면 사단의 자식 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식이기에
사랑의 매로 치시는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 사상에 혜림 사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헤림은 두가지의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온전이 바쳐진 거룩한 헌물입니다.
이 헌물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에 취소하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만일 바꾸려한다면 손해를 두배 받는 것은 바꾸려는 것도 헌물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진멸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완전히 진멸하라는 명령이 곧 헤림사상 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죄도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진멸의 당해야 하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족속에 대한 헤림사상은 여기서 시작된 것은 아닌듯합니다.
노아의 홍수 후 함은 그의 아버지가 포도주에 취하여 대낯에 벌거벗고 잠든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그의 마음에 아버지를 우습게 여겼겠지요.
그리고 그의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창 9장 25에 보면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노발 대발하여 함을 꾸짓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죄는 함이 지었는데 그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한 것을 봅니다.
그 저주를 받은 가나안이 살던지역이 바로 여호수아가 점령한 지역이며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현재의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4장 16절을 보면 노아 홍수이후부터 적여도 1000년을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아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헤림을 당하고 완전이 진멸당하기 위해 내버려 두신것입니다.
왜 제가 헤림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18-20)
(시73:18)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시73:19)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시73:20)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식이며 그 자식을 그냥
죄 가운데 두시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고도 아무 일이나 아니 더 잘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성도인가?
곰곰이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질문이 성전에 들어가서 해답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거만한 자가 잘되고 평안하며 얼굴에 기름기가 줄줄흘르면서 평안히 죽는 것을 보았을 때
시편 기자의 깨닭음은 아.........하나님께로부터 헤림 당했군아!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셨군아! 란 것입니다.
죄인들이 잘되는 것은 복이 절대 아님니다.
오히려 악인이 잘되는 것은 저주입니다.
왜냐!
우리가 아무리 잘 살고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하더라고 죽을 때는 단돈 1전도
지옥에 가져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3장 22에는 악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아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악인이 빨리 죽기를 바라서는 안되겠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전도하여 그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헤림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들인데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을 받은 것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삶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21-24)을 보겠습니다
(시73:21)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시73:22)나는 우둔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시73:23)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시73: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기자는 이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 왜 저렇게 잘사는지 의문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깨닭은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 둔 가엽은 사람이라는 것이 엇습니다.
시편기자는 이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알아주시는 것인지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삶니까?
시편 90편에 모세는 우리가 강건하면 70-80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요사이는 의학과 과학의 도움으로 100세 까지는 살 것 같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이제 20대지만 우리 장년들은 50대를 넘어 60대를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권사님도 이 자리에 계시지만 우리가 건강하고 온전한 기억력으로 내 힘으로 잘살 수 있는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요?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기자와 같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장년들만이 아니라 청년들도 앞날이 창창하게 남았다고 우리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잘 알지만 우리주변에 20-30대에도 자동차사고나 어떤 젊은 청년들도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나의 생의 마지막날이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 자주하는 기도가 오늘도 새날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편기자는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5-28)함께 보겠습니다
(시73:25)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시73:26)내 몸과 마음이 다 사그라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시73:27)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시73:28)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창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태어난 시간은 있으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을 보장 받았습니다.
단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 란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작은 교회지만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나라이며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삶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자의 내세에서의 삶은 세상에서 자신 만만하게 보란 듯이 살던 것과 같지 아니하단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말씀과 같이 거만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부자이라 기름진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데 그 부자 집 앞에는 거지가 살았습니다.
그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그는 건강이 무척 나빠서 지나가는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으며 친구가 되어주며
힘든 삶을 하루하루이여 가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부자들이 식사를 할 때 기름진 음식을 먹고는 손을 수건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빵조각으로 손을 씻고 그것을 개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 빵조각을 개들과 다투며 먹고 생을 살다 병이 더 깊어져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 품에 있었다고 합니다.
부자는 기름진 음식을 잘 먹고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번들하고 조금만 아파도 의원들의
도움으로 오래 살다 그도 오늘 시편기자의 말대로 아프지도 아니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고통을 당하는 음부에 떨어져 고난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자는 멀리 아름다운 광경을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옆에 있던 사람은 의외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어라 그는 다름이 아닌 자기집 앞에서 살던 거지가 아닙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부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받은 사람들로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거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로 생각했기에 자신은 지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데 어떻게 저 거지 같은 거지가 저기있지...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였으며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소리쳐 부르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생각하시어 나사로로 하여금 그 옆의 물 한방울이라도 내게 보내 주게 해주십시오.
나는 지금 목이 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애 너는 살았을 때 복을 누리고 나사로는 고난을 당하였으니 너는 이제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 것이 옳은 것이란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서로에게 오갈 수 없어 도와줄 수 없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현재의 삶이 어려우십니까?
오늘 시편기자의 고백과 같이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에 대한 시샘이 있으신가요?
우리 믿음으로 참아냅시다. 우리의 삶이 거지 나사로의 삶에 비교하겠습니까?
나사로가 믿음 지키고 아브라함과 영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김으로 승리의 삶을 누리며
아브라함과 영원한 삶을 누리는 그날을 바라보며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