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7일 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18편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시 118:18)
The LORD has chastened me severely, but he has not given me over to death.

시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경책하다'란 말씀은 '단련하다' 혹은 '훈계하다'는 의미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심히"라고 반복된 말로 표현하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더욱 잘 느끼게 합니다. 이로인해 시인은 이러한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본 시편 22절에서 "건축자의 버린돌"이라고 표현했을 법도 합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돌'이 되어 아무렇게나 들판에 뒹굴고 있는 시인의 초라한 모습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심한 고난 중에 있던 욥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욥 1:21)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극심한 고난의 상황을 목도하며 눈물로 한숨 짓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고백에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시인은 대적들로 부터 겪고 있는 고난이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인한 것 임을 마음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을 경책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시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생각이 주님의 허락하심 없이 어떻게 시인의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시인은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라고 주님의 기이한 구원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시인은 자기 영혼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 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여기에서 '붙이다'는 말은 '허락하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죽음에 자신의 영혼을 붙이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자신을 향한 참된 하나님의 긍휼과 끝없는 사랑을 깊이 느끼게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고백과도 일치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오 주님! 이 아침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망에서 살리신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를 우리의 입술을 열어 찬양하게 하여 주소서.


(존 칼빈 주석/ 시편 118편) "다윗은 악인들이 자기에게 퍼붓고 있는 비방을, 옳은 길로 가게 하기 위한 온유하신 아버지의 보살피심이었다고 매우 다른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환난 중에 있을 때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낮아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충성되게 하며, 우리의 마비된 심령을 다시 일어나게 하며, 하나님께 복종하고 굴복하여 하늘 나라의 생명을 묵상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하나님의 징계는 비록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치료제의 효과를 내어 우리의 질병을 거두어 주시고, 우리를 건강하고 활기차게 변화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2014년 1월 20일 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18편 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The LORD is with me; I will not be afraid. What can man do to me?  The LORD is with me; he is my helper. I will look in triumph on my enemies.

시인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시인은 이 말씀으로 대적들로 인해 격동되어 요동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라는 시인의 표현을 볼 때, 시인의 마음은 어떤 알수 없는 두려움으로 몹시 떨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을 둘러쌓고 있던 원수들의 압박으로 인해 두려운 마음에 휩싸여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편이 되심을 선포함으로 비로서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는 담대한 마음의 위로를 받게되었습니다. 대적들의 격동으로 요동하게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매일의 체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격동은 너무도 교묘하고 우발적이여서 예상하고 대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말과 행동은 항상 악해서 마치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도피하던 다윗 왕의 마음을 격동시켰던 시무이의 악한 심보를 연상시킵니다.(삼하 16:5)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라고 다시 한번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시인의 편이 되므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호와께서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라는 말씀이 시인의 마음을 더욱 친근하게 위로합니다. 시인은  환란 중에 도움의 손길이 여호와께로 부터 옴을 자신의 입을 열어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는 말씀을 통해 시인의 요동하던 마음이 안정되어 만족함을 얻게 되었음을 알게됩니다. 오늘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님들에게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말씀이 충분한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대적들의 격동 중에도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항상 연약하여 흔들리는 우리 마음에 예수님께서 평안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존 칼빈 주석/ 시 118편)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써 몇몇 대적이 아닌 모든 세상과 맞선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모든 음모를 담대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물리칠 수 있다.' ... 다윗은 이 말씀으로 근거없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불신앙을 은근히 책망하고 있다. 실로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을 멈추어 버린 결과 그들의 배은 망덕함은 이러한 축복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만일 매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능력에 복종했더라면, 환난이나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히는 공포를 언제나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도우심보다는 사람들의 악한 계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낙엽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무서워 떨게 되었다."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18편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5)

시인은 자신이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당한 고통은 어떤 심한 환경적인 곤란이나 마음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심한 고난을 겪는 중 말씀에 붙들려 있었고, 그 고통의 과정 속에서 느끼는 심한 육신의 곤란과 마음의 번민을 여호와께 호소했던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응답하시고"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시인의 이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인에게 응답하신 내용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주님께서 응답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자신이 겪은 심한 고통의 과정을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이겨 내었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심한 고통을 겪은 후 시인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고통을 통과한 후에 자신이 광활한 곳에 서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주님의 구원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던 시인의 상태가 구원의 소망을 잃고 있던 좁고 막힌 공간에 비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은 후 시인에게 허락된 광활한 곳은 구원받은 이후의 상태로 넓고 막힘없는 자유함이 있는 곳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쫒겨 다니던 황무지 광야의 좁은 굴들에서의 처지와 왕이 된 이후 넓은 유대의 땅을 자유롭게 다스리게된 처지를 비교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여러가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성도님들의 음성이 속히 응답되길 바랍니다. 또한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묶는 죄악의 굴레에서 놓여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마 11:29)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에 메여, 주님께서 우리를 항상 자유함이 있는 광활한 곳에 세워주시길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존 칼빈 주석/ 시 118편) "다윗은 자신을 본받아 성도들에게 환난의 날에도 연약해지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선포되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에 일기 쉬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같다. '하나님은 어찌해서 자기 종들이 극심한 압제와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가?'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결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 중에서 모든 고난에 대한 위로와 해결을 얻게 된다고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또한 다윗이 기도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때가 고통을 당하던 때였다고 하는 것은 심한 환난을 당할 때가 가장 기도를 드리기에 적절한 때임을 가르쳐 준다." 

2014년 1월 6일 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18편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1)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들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그의 선하심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즉,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과 지금도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있는 일들을 느끼며 기뻐하고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선하시다'는 표현은 '좋다(good)'는 의미로 이해하면 더 쉽게 그 뜻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맛있어 보이는 사과 하나를 손에 쥐어 주며 이렇게 물어 봅니다. 너 이것이 좋으니 싫으니? 어린 아이는 아주 쉽게 '좋아요'라고 자신의 뜻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너무도 쉽고 단순합니다. 또한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 34:8). 여호와의 선하심을 마치 잘 익은 사과를 입에 넣어 맛을 보아 알듯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시인처럼 그 분의 선하심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느끼기 보다는 구체적인 우리의 체험으로 느낄때 보다 잘 확신할 수 있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야 말로  우리 구원의 이유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이유는 그 분의 인사하심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시 44:26). 그리고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시 25:7). 또한 그 분의 인자하심을 날마다 바라는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1). 하나님 아버지! 고난 중에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오늘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마음으로 느껴 감동하게 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노래가 우리 입술에서 끊이지 않게 하여 주시길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존 칼빈 주석/ 시 118편) "우리는 이 귀절에서 다윗은 단지 개인적인 역량으로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백성들을 불러 함께 거룩한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이나 공의라기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권능이나 공의 가운데 나타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고는 결코 자발적으로 진심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51편 17절에서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진정한 구주로 알게 될 때에는 입을 벌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