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고난
데살로니가 후서 1장 3-7
서론
지난달에는 시편 73편을 통해 우리는 교만한 사람이 잘되는 것에 배 아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운에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답게
대하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고난하면 우리는 생각하길 어려움을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나 나의 몸에 질병 내지는 몸의 부자유스러운
것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면 우리는 자연이 욥의 고난을 생각하게 되며 그가 당한 고난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비록 그 크기는 다르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주시는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 감당하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옥한음목사님께서 쓰신 “고난에는 뜻이 있다.”란 책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옥함움목사님께서는 몸에 질병으로 오래동안 고생하시다 지병으로 몇해 전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옥목사님께서는 고난을 일컬어서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옥목사님께서는 그 이유를 “고난을 당할 때에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더
전진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고난이
우리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라고 하십니다.
옥목사님께서는 한국기독교에 큰 공헌을 하신분이며, 또 교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모범적인 목회를 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데살로나가 후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인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2절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고 이것이
당연함이라 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까요?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알아야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1절 말씀과 같이 바울과 실라가 세운교회입니다.
디모데는 그 교회에서 사역을 한듯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2차전도 여행을 하면서 유럽 첫 사역지인 빌리보교회를 개척하고 옥에 갇혔다가 밤12시경에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였으며, 이에 응답하여 지진이나 바울을 지키던 간수가 자살하려는 것을 막고 전도하여 빌립보교회가 개척되었으나
유대인의 핍박으로 빌리보를 떠나 도착한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는 3주간 유대의 회당에서 가르쳤으며 다수의
유대인들과 경건한 혈라인들이 바울과 실라의 말씀을 듣고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가 많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이고 유대교에서
떠나는 것에 화가나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고, 시장에서 불량한 사람들을 고용하여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지 아니하면 안 될 위기를 맞았고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를 돌보게 한 후 바울은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 아덴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받아야 하는 고난을 생각하지 아니
할 수 없었으며 한참 후 디모데가 전하는 소식에 마음 놓고 다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바울은 이단들이 들어와 예수님께서 이미 재림하시었다
고 도하고 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는 이단적인 요소를
퍼트리는 것에 대하여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고난을 받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초대 교회가 당한 고난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신민지 국민으로서 로마의 황제를 “나의 주님이심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께서 주인이시기에 그들이 고백하는 주인이 황제가
아님으로 죽음을 감수하며 살아갔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한국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신이 보낸 사람”입니다.
이 영화는 북한의 성도들의 삶을 그린 영화이며 그들의 삶은 고난이라 하기 보다는
비참한 삶 그 자체이었습니다.
영화의 시작에 한 여성도가 시편 23편을 가냘픈 목소리로 외우는 소리로 시작됩니다.
그 여인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근거로 제작한 영화라고 처음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보아 탈북자가
증언한 내용을 한국교회가 지원하여 만든 영화였습니다.
그 여자 성도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고문을 받고 다리를 쇠망치로 때려 몇 조각을
낸 후 인두로 여자의 국부를 찌진 후 결국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와 북한성도들이 믿는 예수가 같은 예수인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왜 이리 차이가 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나라에 와서 살면서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왜 이리 보잘 것 없는 믿음인가요?
만일 내가 북한의 성도들과 같은 고문을 받는다면 나는 예수를 부인하겠다고
하지나 아니할까 심히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물어보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고난...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는 현재 북한이나 이슬람국가에서 예수를 주로 믿음으로 받을 고난을 생각조차
안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에게 복음을 더 잘 전하고 믿음대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미국에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어
그냥 평안한 마음으로 교회 나오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다고 우줄대지는 아니하는가요?
물론,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주일을 지키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같이
거짓말이나 욕하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자연적으로 재정적이나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이라 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하는 도리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산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며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생명을 줍니다.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고 음식으로 맛을 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 삶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꼴통 같은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알아주시면 그만이지 아니할까요?
데살로나가 성도들은 바울이 보기에 아마 북한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바울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4절에 바울은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받는 고난에 대하여 바울이 세우고 섬기는 여러 교회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예수님께서 천사들에게 자랑하고 계실까요?
“보아라 비록 작은 교회지만 얼마나 열심을 내고 나를 위하여 핍박과 고난을
받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실까요?
모름직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의 수가 우리교회 인원을 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크기와 고난의 크기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가운데 오직 두 사람에게 만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는 백부장의 믿음이요, 또 하나는 귀신들린 딸을 가진 이방여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반을 따라 다녔지만 하나는 예수를 팔고 하나는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하는가 하면 스승이 체포되자 다 도망하고 두려워 집에 숨어있었으며 “믿음이 적은자들아” 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어떻습니까?
책망 받을 믿음인가요 아니면 백부장과 수로보니게여인(막 7:26)과 같이 칭찬받을
만한 믿음이가요?
그렇다고 저는 지금 우리자신이 자청해서 고난을 감수하여야 믿음이 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의 교부가운데 고난을 당해야 큰 믿음인 것으로 생각하여 수도원 생활이나 광야 생활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높은 나무를 세우고 그곳에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위에서
몇 십 년을 살은 교부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수양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은 받았지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21세기를 살아가면서 특별이 미국 그것도 세계의 정치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워싱톤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 시대로 말하면 우리는 로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는 타락한 도시입니다.
우리가 사는 워싱톤 역시 타락한 도시입니다.
그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고난은 믿음을 지키는데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은
이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악한 영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대적합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이 크리스천의 국가입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크리스천에게 우호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떻습니다.
지번주 메릴렌드 한 시의원은 자신은 회의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이제 학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없습니다.
빌라델피아에서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면 법의 저촉을 받습니다.
학교에서는 식사기도하면 눈총을 받습니다.
사회에서 주일날 문 닫고 교회에 가면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데 예수를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자연이 핍박과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옥한음목사님은 그의 저서에서 고난에는 뜻이있다고 하였습니다.
왜일까요?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이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인정받는 표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난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나라의 성도는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성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증명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필이 통과해야 할 필수 과목은 고난이란 과목을
통과해야 만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고난의 과정을 성도로 하여금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고난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욥기는 고난을 통해 정금과 같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큼 정결하지 못합니다.
믿음에도 불순물이 많이 끼어있는 것입니다.
유혹의 불순물, 거짓말의 불순물, 탐심의 불순물, 욱하는 성깔의 분순물, 다른사람에 대하여 수다떠는 불순물,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불순물, 기도에 게으른 불순물,
성경읽는 것을 싫어하는 불순물, 등등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여 많은 불순물이
끼어 있습니다.
이러한 불순물을 없이하는 것은 금을 불로서 7번 제련하여 정금으로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이란 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빛나게 하십니다.
두 번째 요셉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고난이 없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만일 요셉에게 13년의 고난의 과정이 없었으며 그는 그저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수와 같은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종으로 살다 음탕한 주인여자의 질투로 감옥에 갇히는 등 13년간 고난의 과정을 거쳐 대 애급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이스라엘이
국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여 준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세 번쩨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의 고난을 통해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하던 신앙인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순종하여 여리고를 믿음으로 함락시키고
가나안주민을 몰아내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넷째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사단의 가시를 위해 3번이나 기도할 정도로 고난을 받았으나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한데서 강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다섯째는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3년 반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으며 모든 무릎이 예수의 앞에 엎드리도록 모든 인류의 주로
삶으셨습니다.
여섯째로 시편기자는 119편에서 고난을 당하기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했으나 고난을 통해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율례를 배운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일곱째로 야고보서에서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지킴으로 시련과 고난이 찾아오나
그 고난을 잘 이기어 내면 인내를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지 아니 하신다면 우리는 벌써 종말을 맞이하고 지옥의 자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
지금까지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고난은 그저 당하여야 만하는 것일까요?
고난을 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것 같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있다면 무슨 죄일까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교만일 것입니다.
천사장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단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14장과 에스겔서 28장을 살펴보면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도들이 교만한 것을 그냥 놔두실 수 없으십니다.
사단이란 뜻은 대적하는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교만한자는 대적하는 자이며 사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유하시고 인자하신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5장 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연약한 성도들인 우리가 고난을 통해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당하는 성도들을
도우십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것이요”라고
하십니다.
고난은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고,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어도 십자가의 고난을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에 피가 섞여 흘리시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그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력하여 서로의 고난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며 그 기도를 응답하시어
우리가 고난의 과목을 잘 통과하여 축복을 주십니다.
결론
저는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인한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고난을 받은 사람이 승리한 삶을 살아간 것을 히브리서 11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인은 아니지만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자랑하시어 고난을
통과한 욥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욥은 대략 4000년 전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추축합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마치면서 18세기 말에 욥과 같은 삶을 살은 호례이쇼 G.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스패포드는 시카고의 저명한 변호사였고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이며 신학교 이사 및 운영위원이었습니다.
스패포드는 18세기말 유명한 전도자 무디교회에 다니며 무디의 전도사역을 돕고
그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였습니다.
그에게는 4명을 딸과 막내로 4살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1870년 초 그의 막내아들이 열병으로 죽었으며 스패포드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1871년 시카고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들은 이야기는 어느집의 마구간에서 말이 등잔불을 뒷발로
차서 시카고 대화재가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화재로 스패포드는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한 상태였지만 시카고의 대화재로 자신의 집과 모든재산 그리고 그가
출석하던 무디교회도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패포드는 무디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었으므로 교회당 재건과 화재로 모든 서류가
불타 없어진 상황이고 그의 건물에 대한 재산권 때문에 그의 부인과 네 명의 딸이
먼저 여행을 떠나고 자신은 며칠 뒤에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한 여객선은 새벽 2시, 손님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영국선적의 철갑선 ‘로키안’과 정면 충돌해 2백26명의 선객을 실은 채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고 직후 스패포드 부인은 네 아이를 이끌고 갑판 위로 달려 올라와 두려움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나 여객선은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30분도 채 못 되는 동안의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하기 직전 실신한 채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4명의 아이들은 익사했습니다.
9일 후 스패포드 부인은 웨일스의 카디프에 도착하여 남편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혼자 구조됨(Saved alone)’. 이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찾아와 스패포드를 위로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어려운 고난이 닥쳐왔으나, 주님을 의지하게
되니 매우 기쁩니다”.
그는 아내를 데리러 서둘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탄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경에 그는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으로 가득 찼아 왔습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어 마음의 평안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Bliss,1838~1876)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하여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1881년, 시카고에서 떠나 예루살렘에 가서 한 수도원에 정착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았으며 세계일차 대전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역을 감당하다 60세 생일을 3일 앞두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원은 후일에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패포드가 그 환란 중에서 체험한 평안을 세상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평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게 되어도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베드로전서 4장 12-18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벧전 4:12-벧전 4:13]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2)Dear friends, do not be surprised at the painful trial you are suffering, as though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13)But rejoice that you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so that you may be overjoyed when his glory is revealed.
(14)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15)If you suffer, it should not be as a murderer or thief or any other kind of criminal, or even as a meddler. (16)However, if you suffer as a Christian, do not be ashamed, but praise God that you bear that name.
(17)For it is time for judgment to begin with the family of God; and if it begins with us, what will the outcome be for those who do not obey the gospel of God? (18)And, "If it is hard for the righteous to be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ungodly and the sinner?"
The first was the death of their only son from Scarlet Fever in 1870. Second was the 1871 Great Chicago Fire which ruined him financially (he had been a successful lawyer and had invested significantly in property in the area of Chicago which was decimated by the great fire). His business interests were further hit by the economic downturn of 1873 at which time he had planned to travel to Europe with his family on the SS Ville du Havre. In a late change of plan, he sent the family ahead while he was delayed on business concerning zoning problems following the Great Chicago Fire. While crossing the Atlantic, the ship sank rapidly after a collision with a sea vessel, the Loch Earn, and all four of Spafford's daughters died. His wife Anna survived and sent him the now famous telegram, "Saved alone …". Shortly afterwards, as Spafford traveled to meet his grieving wife, he was inspired to write these words as his ship passed near where his daughters had died.[3]
Bliss called his tune Ville du Havre, from the name of the stricken vessel.[4]
The Spaffords later had three more children. In 1881, the Spaffords, including baby Bertha and newborn Grace, set sail for Israel. The Spaffords moved to Jerusalem and helped found a group called the American Colony; its mission was to serve the poor. The colony later became the subject of the Nobel prize winning Jerusalem, by Swedish novelist Selma Lagerlöf.[3]
[신 8:16-신 8:16]
(16) (16)He gave you manna to eat in the desert, something your fathers had never known, to humble and to test you so that in the end it might go well with you
(시 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7)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I obey your word
[시 119:71-시 119:71]
(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1)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약 1:3-약 1:4]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3)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develops perseverance.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4)Perseverance must finish its work so that you may be mature and complete, not lacking anything.
[히 12:11-히 12:11]
(11)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그 징계가 달갑지 않고 괴로운 것 같지만 후에 그것으로 단련을 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안의 열매를 맺습니다. (11)No discipline seems pleasant at the time, but painful. Later on, however, it produces a harvest of righteousness and peace for those who have been trained by it..
[벧전 4:13-벧전 4:13]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3)But rejoice that you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so that you may be overjoyed when his glory is revealed.
[히 2:18-히 2:18]
(18)주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넉넉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18)Because he himself suffered when he was tempt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being tempted
[약 5:13-약 5:13]
(1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13)Is any one of you in trouble? He should pray. Is anyone happy? Let him sing songs of praise.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흔들어새끼가 떨어지면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아 올리듯 하셨네.
like an eagle that stirs up its nest and hovers over its young, that spreads its wings to catch them and carries them on its pin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