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3일 월요일

정덕영의 시편 묵상 127: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In vain you rise early and stay up late, toiling for food to eat -- for he grants sleep to those he loves.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된 일이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다(표준새번역).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헛되도다', 솔로몬은 이제 부자가 되기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자들의 수고가 다 헛됨을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만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때 우리는 세상적인 일을 올바르게 수행하게 될 것이며, 그 경우의 성공은 우리의 소망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열심히 일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이는 스스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줄달음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자기가 말한 하나님의 축복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종들에게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 이 귀절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실 것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여호와께서 잠을 자는 중에 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이 노력하여 얻으려고 애쓰는 것들을,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 '잠'이라는 말은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고, 참된 성도들이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얻는 평탄한 수고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성도들에게서 정도를 넘는 고통이 일어난다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그 자신의 태만에서 나온 것이다(존 칼빈 주석/시 127편 2절 중에서)."


조지 모르슨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근심을 초래할 과로를 경계한다. 그는 전혀 쉬지 않을 정도로 일중독에 빠진 사람을 묘사한다. 이러한 모든 분주함과 열렬한 활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일 뿐만 아니라, 실수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리에 눕는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에 미치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쉬지 못한다면, 그는 분명히 가장 귀한 것과 최상의 것을 놓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이것들을 '잠자는 중에(in sleep)' 주신다('잠은 선물이다(시 127:2)'/조지 모리슨의 영광의 아침/생명의 삶/2011년4월호 중에서)." 오 주님! 하나님의 어린 양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평안한 잠이 항상 있게 하여 주소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나를 본받는자가 되라(1)

바울은 누구인가?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에 대하여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바리세인으로 스테반집사를 돌로 쳐죽일 때 앞장섰던 사람.
다메석으로 가다 오후 12시 경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보고 눈이 멀고 주님을 뵙고 예수님의 종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로마에서 죽은사람.
또는 신약성경을 반정도 쓴사람...
또 바울에 대하여 무엇을 아시는가요?
베쟈민족속... 바리세인...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 또.....
그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다소.... 어느지역입니까? 길리기야 지방..
또 무엇을 아십니까?
음......... 4차전도 여행으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유럽을 복음화 한사람..........
와......... 많이 아십니다.
그럼 성경에서 나를 본 받으라 고 한 사람은 몇 명일나 될까요?
예 제가 알기로는 모세도 그런 말을 하지 아니했고 사무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다윗역시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 제가 맡습니까?
그러나 유독 바울 사도는 나를 본 받으라! 는 말을 세 번했습니다.
P한번 보시죠.
(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행한 것 같이 하기 위해 본을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쓴 많은 선지자와 학자, 왕, 제사장,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이 나오지만 오직 예수님을 빼고는 바울사도만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조금전 저는 바울사도에 대하여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모두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바울의 배경이나 그의 사상 그리고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바울에 대하여 알고 있을까요?
사실 바울에 대하여 공부를 한다면 박사 학위를 15개 받아도 모자를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바울신학과 바울 서신 등 여러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에 대하여 설교를 준비하려고 보니 바울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사전 program에 바울 하고 입력하였더니 자그마치 18장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또 internet에 들어가 바울 하니 신학적인 것과 설교 그리고 사진등 바울에 대한 자료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참 성경을 헛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쓴 사람에 대하여 알 필요는 없지만 그가 쓴 성경의 말씀이 저자의 배경과 그의 사상을 이해하면 좀 더 저자의 뜻을 깨닭게 되지 아니 할까요?
저는 그런 뜻에서 허락하시면 3번에 걸쳐 바울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개론적으로 바울의 성장 과정과 생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다음번 설교에서는 바울의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바울에 대하여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첫 번째 바울을 고향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성장했느냐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한국에서 요사이는 법적으로 고향이 어디인가? 라고 인터뷰나 원서에 질문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하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등 우리는 고향이 어디인가에 때라 사람을 차별하고 또 끼리끼리 모이는 습성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에 와서도 그런 것이 많은 것을 사업을 하면서 봅니다.
P
바울의 고향은 길리기야지방의 다소입니다.
다소는 항구도시입니다.
지도에서 다소를 찾으셨습니까?
P
항구도시라 하면 보통 혼잡하며 많은 불륜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바울이 살던 다소 역시 이에 버금가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다소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시이며 상권은 물론 교육의 도시이고 정치적인 도시입니다.
다소에서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특별히 스도이고 철학의 영향력을 많이 받은 도시입니다.
다소에서 유명한 철학자인 아덴노도로스는 로마의 아구스트(Augustus)황제를 가르친
학자이기도 합니다.
다소는 바울시대에 25만명이 살던 특별 자치 도시를 형성하였다고 합니다.
특별 자치 도시라함은 로마 법에서 자유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로마의 통치를 받는 나라들은 조공과 조세를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도 세리들이 세금을 받아 로마에 바치는 역할을 함으로 세리들을 매국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소는 그러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린 것입니다.
다소의 시민들과 상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지 아니한 것으로 매우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며 다소정부는 세금을 사용하여 좋은 길을 만들고 교육시설을 유치하며 공공안전과 공건보건에 많은 돈을 사용하여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 다소의 인구는 급속도록 팽창했습니다.
고대에 무역은 배를 통해 무역을 하던 시대에 다소는 동서를 이어주는 창구 같은
지역입니다.
다소를 지나야 다른 곳으로 가기 쉬워 다소를 통과하는 배들이 항상 번잡하게 오가는 그런 곳이 바울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왔다 같다 함으로 많은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소는 헬라어를 사용하였으며 로마어인 라틴어, 바울의 모국어인 히브리어 그리고 노예들의 언어와 이집트어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다소는 로마의 특별 도시라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된 지역입니다.
다소의 시민권자는 로마의 상원의원이 될수도 있고 공직자나 군인으로 로마의 권리를
마음 것 누리는 자부심이 대단한 지역의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부모들은 그 지역에서 상업을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자라고 하여 매 맞는 것에서 모면하였던 것을 보아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는 다소의 시민에게 다소에서 4대에 걸쳐 살면 자연이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바울은 할아버지 이전부터 다소에 살면서 할아버지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와 바울은 자연이 로마의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취득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베스도에게 자신을 황제의 재판에 회부해 주길 상소하였는데 바울은 헬라 문화를 배우면서 로마의 법을 배웠고 로마 법 가운데는 로마시민으로서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황제에게 직접 심문을 받을 수 있을 있는 권리를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다소의 특산물은 다소의 뒷산에서 나오는 풍부한 광물질과 흑염소털이 유명합니다.
특별히 다소의 흑염소의 털은 많은 나라에 수출을 하여 큰돈을 벌었습니다.
바울이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예! 천막짓는 일이었죠.
유대인들의 남성들은 자신이 공부하는 것 말고도 기술 한가지씩은 꼭 익혀둔다고 합니다.
바울과 같이 가르치고 공부로 생활이 안 될 때 나가서 기술로 가정생활을 이끌어 가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교사역을 하면서 천막 짓는 일을 하여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아니하고
자비량선교를 처음으로 시작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다소의 흑염소 털로 두터운 외투나 양탄자 그리고 천막을 만드는 것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다소의 흑염소 천막은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이 바울이 천막 짓는 일을 배운 것은 그 지방의 토산물이기에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P사진은 현재 공원으로 지정된 바울의 생가로 현재 우물 터 만이 남았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이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의 히브리이름이 무엇이던가요?
예 사울입니다. 그럼 바울이 로마적 이름인가요? 헬라 이름은 인가요????
그 정도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행전 13장 9절 이전에는 사울이라 사용하다 별안간 바울로 바뀌는가요?
어떤학자들은 바울의 선교과정에서 구부로 섬의 총독의 이름이 서기오 바울이 얻으며 그가 개종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바울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아본 결과는 좀 다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자녀들의 이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Peter는 이름이 이 Peter 성한 입니다.
바울시대에도 그의 부모는 바울에게 히브리이름으로 사울이라 지었고 그뜻은 ‘구하다 요구하다’란 의미가 있으며 로마 시민권자로서 로마식 이름을 바울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작은자’란 의미의 두가지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구브로섬에서 총독이 회심하여 사울에서 바울로 사용한 시간적 이유는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음은 바울의 유년기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언제 출생하였을까요?
바울이 언제 출생하였는가는 대체로 BC5년에서 AD5년 까지 다양합니다.
바울이 순교한 년도를 대략 주후 67-68년으로 봅니다.
그러면 대략 바울은 70여세 때 순교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베냐민지파에 속하고 그의 아버지는 바리세인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크게 세파로 나뉩니다.
사두개파, 바리세파, 에센네파입니다.
사두개파는 주로 제사장들이 많았으며 성경에 보면 그들은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나 영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안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바리세파는 그 당시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주던 파입니다.
바리세인들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서기관 역할을 감당하며 모세의 율법과 언약을 중요시 하여 글자 그대로 믿고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에센네파는 가장 경건하고 또 남성위주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유업으로 우리는 쿰란동굴의 성경사본은 에센네파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성경사본을 만든 것이 현재까지 우리에게 보존된 것입니다.
바리세인들은 5세정도 부터 회당에 보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역시 그의 고향인 다소에 있는 회당에 보내져 성경을 배웠을 것입니다.
다소의 부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유식한 노예들을 사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가르치게 하고 또 회당에 오고 가는 일을 위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몽학선생이란 단어를 썼던 것입니다.
아마 바울도 몽학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10살이 되는 유대 어린이는 회당에서 미쉬나를 배움니다.
13살에는 모세의 유법을 배웠으며 그들은 모세 5경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가르쳤으며
15살이 되는 나이에는 탈무드를 배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세인인 바울의 아버지는 다소가 헬라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는 지역이라 바울의 부모들이 바울에게 헬라 문화를 익히게 한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선교 여행 때 헬라의 중심지인 아덴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스토익 철학자들과 에비구레오 찰학자들과 학적인 논쟁을 한 것을 볼 때 바울도 스토익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총독인 베스도는 바울이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의 간증을 듣고 24절에 하는 말이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의 학식에 대하여 총독인 베스도 역시 인정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향 다소에서 13-15까지 자란 후 그는 예루살렘에서 사는 누나를 따라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받아들여져 당대의 Ivy league라고 할 수 있는 가말리엘에게 배웠습니다.
가말리엘에 대하여는 다음번 바울의 신앙에 대한 설교에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본 기록이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to be continue 기대하시라......
P바울의 모습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인물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10:10은 "그(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을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의 바울에 대한 악평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풍채는 과히 훌륭한 것 같지 안은듯합니다.
`바울과 테크라 행전'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다리가 굽고, 골격이 다부지고, 눈썹이 서로 맞붙고, 콧날은 약간 굽고, 표정은 온아(溫雅)함이 넘쳤다. 때로는 인간 같고, 때로는 천사 같이 보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아 바울의 외모는 사람을 위압하는 위풍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대할 때는 약하고"라고 조소받던 바울을 갈라디아 교인들은 (갈4:14)"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은 행20:37에서 바울과의 작별을 애석하여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롬16:3,4). 라고 하고있습니다.
바울의 아름다운 내적사람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바울의 안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가시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서 그는 `육체에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과연 어떤 성질의 병이었는지, 설이 구구하여 알길이 없습니다.
짐작하기는 그가 간질이 있었다. 고도 하고, 다메석에서 본 광선으로 시력이 약하여 졌다는 설과 그가 곱사등이라는 설 등 큰 고통과 불편을 준 것만은 틀림 없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서 만난 누가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에 조력자로 준비해 주신 의사 인 누가가 늘 동행한 것은 병고에 괴로움을 받던 바울에게는 크나큰 위안과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병고와 싸우면서도 그와 같이 4차에 걸쳐 대 전도를 수행한 바울은 참으로 체력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기 보다는 `강하게 된 사람'이었으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란 것이 그의 간증입니다.
또 바울은 "죽은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6:9)라고 하고 있으며
그는 전도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연단시킨 사람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전9:27).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사도의 가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니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왜냐!
그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가시이던 간에 바울은 우리보다 더 큰 고난과 더 큰 가시를 가지고 있던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데살로나가 후서 11장에 그는 간증하길 유대인들에게 39대를 5번씩이나 맞고 3번은 태장으로 맞았으며 한번은 돌로 맞아 죽은 줄 알았고 그의 탄 배가
3번씩이나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선교 여행하는 가운데 강도의 위험과 강을 건너는 위험과 유대인들의 위험과 이방사람들의 위험을 감당하여야 했으며 이단형제들의 위험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섬긴 것 같이 우리도 신실하신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핍박자로서의 바울과 그의 회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바울은
다음번 바울의 신앙을 다루면서 좀더 깊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순교자로서의 바울
사도행전 이후의 바울에 대한 소식은 분명치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2년간의 연금 후 석방되어 계속 몇 년 동안 더 전도 활동을 계속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기사는 사도행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바울의 활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서버나 지금의 스페인까지 전도했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 당시 땅 끝으로 생각한 스페인을 선교하길 원했으며 그 뜻을 이룬 것입니다.
바울은 네로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불이 크리스찬들이 낸 것이라고 들러댔습니다.
그때부터 크리스찬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져 바울은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감금되었으며. 디모데후서는 옥중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썼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순교할 때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너무 황송해서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자가 아니었다면 바울 역시 십자가형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시민이기에 로마의 시민은 그런 끔찍한 형은 받을 없다고 하여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순교한 연대는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AD 67년이고, 히에로님스에 의하면AD 68년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되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난 커서 아빠처럼 될래!
하면 우리는 성공한 부모가 됩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자녀들에게 너는 커서 아빠처럼 엄마처럼 되거라...
하기는 정말 쉽지 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자신을 내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라고 한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바울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았고 정말 모든 사람들도 잘알게 행동을 올바르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무엇을 본받아야 할까요?
오늘 저는 무엇을 바울을 본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 드리전에 먼저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만 아니했어도 유대인들에게 인정받고 바리세인으로서 많은 바리세인들을 양육하는데 큰 공헌을 했을 것이며 산혜드린 멤버로서 유대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노인이 되어 머리가 잘려 죽지 아니하고 부자로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를 만나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모름 직이 아직도 저의 할아버지들이 다스리는 이씨조선가운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예수의 증거자로 삶을 산 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큰 축복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음으로 복음이 유럽에 전하여지고 그 복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150여년전 Thomas 선교사가 1866년 9월 2일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활에 맞아 불에 타 순교한 후 저의 증조외할아버지처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국에서 와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하여 지고 그 복음이 결국 우리가 받게 되어 이제 종주국인 미국에 와서 다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바울이 담대하게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그 말을 순종하고 바울과 같은 언더우드와 많은 선교사들이 바울을 뒤이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것이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님을 본받기는 부담스럽습니다.
완벽한 사람이신 예수... 한 번도 죄를 짓지 아니하신 예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를 본받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와 성전이 같은 사람입니다.
혹시 바울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전혀 다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이 헌신된 마음과 순종의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은사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단.... 우리가 바울과 같이 헌신된 마음과 순종하는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을 본받아 바울이 받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과 금 면류관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랑스런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어 그들도
그들의 자녀들에게 바울의 본을 보이며, 우리 모두 바울의 본을 받는 성도가 되시길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정요셉의 시편묵상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Tho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He who goes out weeping, carrying seed to sow, will return with songs of joy, carrying sheaves with him.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붙들려 간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씨를 뿌리는 때와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의 예언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추수에 대한 소망을 주셨다. 그러나 오랜 기간 계속되는 포로생활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심히 큰 고민과 고통을 더해 주었다. ...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받았을 때는 즐거운 추수가 따라왔다. 주님께서 가장 대풍년의 수확을 거두어들인 것과 같은 기쁨을, 그들에게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선지자가 성도들에게 미래를 바라보고,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회복은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 비록 왕의 칙령이 유대인들을 그냥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음에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점차적으로 두려움 속에서, 적은 무리를 이루어 돌아갔다. 더우기 돌아간 자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고 거친 대접을 받았으며,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이전의 포로생활과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운지, 우열을 따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여전히 고통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수할 시기가 무르익었으나,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권면하기를, 보다더 좋은 환경에 이를 때까지 더욱 열심히 일하고, 계속되는 곤경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말고 인내하라고 한다(존 칼빈 주석/ 시 126편 5-6절 중에서)."


시인의 고백은 마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의 올바른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습성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습성을 거스려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더니,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기쁨으로 거두어 진다고 합니다. 눈물과 고난 없이 기쁨의 결과만을 바라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고 들려 집니다. 고난의 눈물을 흘린 이후에 축복의 기쁨을 거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가 이렇게 하시길 바라시며, 또한 그렇게 하시길 기뻐하고 있으시다고 믿어집니다. 오 주님! 하나님의 어린 양들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의 기쁨이 임하게하여 주소서. 그 기쁨 중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여 주소서.

2014년 6월 2일 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24:6-7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6-7)"
Praise be to the LORD, who has not let us be torn by their teeth. We have escaped like a bird out of the fowler's snare; the snare has been broken, and we have escaped.

"'우리를...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6절)', 시인은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았은즉 입으로 감사할 것을 권면한다. 시인은 여기서 또 다른 이유를 들어,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다 끝났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성도들이 마치 사나운 들짐승에게 ‘씹힐먹이’의 상태에서 모면한 경우처럼, 구원받았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동일한 내용에 대해 세번째 비유가 나온다. 즉 ‘작은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 붙잡힌 것처럼, 성도들이 원수들의 올무에 사면으로 둘러싸였다가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마치 붙잡힌 새가 자유롭게 놓임을 받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요컨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연약하고 모사가 없으며, 도움이 부족하여 피에 굶주린 맹수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새 그물과 올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힘은 물론 계교에서도 원수들보다 크게 뒤떨어져, 많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이적적인 방법으로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해 낼 수 있을 것이다(존 칼빈 주석/ 시 124편 6-7절 중에서)."


시인은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치 새 잡는 그물에서 새가 구하여 지듯이 자신의 영혼이 구원되었음을 찬양합니다. 새가 그물에 잡혀 있었듯이 구원받기 전에 시인의 영혼도 사냥군의 올무에 잡혀 있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새를 가두고 있던 그물이 찢어지듯이 시인의 영혼을 옭아 매었던 올무가 벗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올무가 끊어지므로’ 시인의 영혼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는 시인의 상처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 받고 회생되었던 체험이 담겨 있다고 믿어집니다. 오 주님! 하나님의 어린 양들의 영혼이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24:2-3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시 124:2-3)"
if the LORD had not been on our side when men attacked us, when their anger flared against us, they would have swallowed us alive;

"'사람들이...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2절)', 시인이 같은 말씀을 두 번씩 되풀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위험 속에 처해 있을 때에는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가도 구원을 받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가 당했던 환난이 극심했던 것을 잊어버린다. 사단은 이러한 계교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를 속여, 하나님의 은혜를 모호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모두 여호와의 기이하신 방법으로 보호를 받은 후에는,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해, 모든 것들을 상상적인 사건으로 돌리려 하기 때문에, 다윗은 백성들에게 놀라움을 더해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험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당한 위험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정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못하게 하는 재갈이 들어 있다. ... '저희의 노가...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3절)', 이 말씀을 통해서 다윗은 야만적인 포악성뿐만 아니라 힘의 불균형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먼저 원수들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는지를 말하고, 다음에 유대인들이 그들을 대적하기가 얼마나 연약하고, 힘에 벅찬 일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다(존 칼빈 주석/ 시 124편 2-3절 중에서)."


시인은 대적들의 노가 얼마나 맹렬했는 가를 잘 기억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산채로 삼킨다'는 표현을 통해 맹렬함의 강도를 더욱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주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체험과 그 감격을 잊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기억이 우리 안에서 새로운 고난을 이겨내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활을 할 것임을 믿습니다. 오 주님! 우리의 편이 되셔서 대적들의 노가 어린 양들의 영혼을 삼키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4년 5월 13일 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24:1-5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시 124:1-5)"
A song of ascents. Of David. If the LORD had not been on our side--let Israel say--  if the LORD had not been on our side when men attacked us, when their anger flared against us, they would have swallowed us alive;  the flood would have engulfed us, the torrent would have swept over us,  the raging waters would have swept us away.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다윗이 단지 어떤 한 구원 사건만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구원하심 속에 나타난, 모든 실례들을 일반적으로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 족속들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여러 강한 군대로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는 거의 멸망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처음부터 그렇듯이,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처럼 불확실하고 변하기 쉬운 교회상태를 표현하여, 교회의 견고함은 그 자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보전된 것이며, 위험 속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과 가까이 거했음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 '그 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처음에는 '물'이라 표현했고, 두 번째는 '시내', 세 번째는 '넘치는 물' 또는 '맹렬한 물'이라고 나타났다. 다윗은 '엄몰하며, 영혼을 잠갔다'고 말하여 마치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백성들이 공포에 사로잡힌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감격적인 용어들은 그림 같은 표현의 모든 효과를 나타내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얼마큼이나 깊은 웅덩이에서 건짐을 받았는지를, 보다더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자기가 구원받기 전에 버림받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자만이, 자기의 구원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존 칼빈 주석/ 시 124편 1,4-5절 중에서)."

시인은 대적들의 그 맹렬함은 자신들의 영혼을 잠그기에 충분할 만큼 깊고 매우 두려웠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자신의 영혼이 어둠에 잠기는 것을 목도한 다는 것은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체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닦치는 두려움과 떨림이 아무리 강할 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감격을 결코 감소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 주님! 우리의 편이 되셔서 넘치는 물이 어린 양들의 영혼을 잠그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4년 5월 6일 화요일

정요셉의 시편묵상 121:5-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5-8)"
The LORD watches over you--the LORD is your shade at your right hand; the sun will not harm you by day, nor the moon by night. The LORD will keep you from all harm--he will watch over your life; the LORD will watch over your coming and going both now and forevermore.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시인은 이 표현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유익을 찬송하고 있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을 들어 전체를 설명하는 제유법을 사용해서, 선지자는 성도들이 모든 환난 중에서도 안전하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밤의 차가움과 낮의 뜨거움이라는 말은 비유로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 생활 속에서 동일한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그늘은 항상 그의 백성들의 편이 되어 그들을 지키사, 해를 입지 않게 해 준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은, 모든 치명적인 해를 당하여도 안전할 것이다. 선지자는 이 점을 다음 귀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듯, 자기 백성들을 모두 죄악에서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지키시리로다', 이 말씀은 네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하든지, 복되고 성공적인 결과를 볼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으로 자기 종들을 인도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 오직 하나님의 지켜 주심을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세상의 모든 헛된 신념과 이별을 고할 수가 있을 것이다(존 칼빈 주석/시121:6-8 중에서)."

시인의 입술을 통해 주님께서는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절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지키다'의 문자적 의미에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 치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양무리를 악한 짐승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초장 주위에 울타리를 치는 목자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개입하셔서 성도의 삶과 영혼을 격동시키고 괴롭게 하는 모든 해악과 악인들로 부터 안전하게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오 주님! 환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영혼을 악인들로 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소서. 우리의 출입을 지켜주시어 평안 중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여 주소서.